겨울의 이야기(15) -fin

마침내 보리스와 나는 눈 덮인 벌판이 끝나는 곳까지 왔습니다. 수직으로 깎아진 높은 벼랑 옆으로는 비스듬하게 내려간 비탈길 끝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건너편은 내 눈에도 내다보일 정도였고 작고 깨끗한 자갈들이 깔린 강바닥은 아주 전혀 깊지 않아 헤엄치지 않고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물은 깨끗하고 아주 맑아서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이 그저 맑은 물만이 흐르는 강은 가장 깊은 곳까지도 말갛게 들여다보였습니다. 희미하게 안개가 어디선가 흘러오더니 강 저편은 어느새 빠르게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작은 개울 같은 그 강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까지도 맑고 투명했습니다. 나는 강가로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서늘한 물이 발에 닿았을 때야 난 내가 맨발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물의 흐름이 발을 간질이고 지나갔습니다. 나는 어느새 물이 발목까지 차 오른 곳에 서있었습니다.

"보리스, 그럼 어째서 이렇게 떠나는 거야? 어째서 보리스는 이렇게까지 먼 곳까지 와야 했던 거야? 왜 오늘이었던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오늘 이후엔 내가 사멸한다는 걸 알고 있어."

"보리스 한가지만 말해줄게. 나는 이전에도 유령들을 봤었어. 음, 그러니까 에바 마리랑 보리스가 찾아오기 전가지는 난 그걸 그냥 엄마랑 아빠가 말했던 것처럼 환상이나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난 닉을 봤던 기억이 나. 라임색 스케이드 보드 슈트를 입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공중에 떠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난 엘리자베트를 본적도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딱딱하고 커다란 나비모양의 안경을 기고 커다란 공책을 들고 있었어. 봤었는지도 확실하진 않았었지만. 그래 난 그 사람들을 봤었어. 그렇지만 손을 흔들어주지도 미소 지어주지도 인사하지도 않았었어. 보리스 난 에바 마리와 보리스를 제일 좋아했었어. 이 말을 하고 싶었어.

 

꼭 잡고 있던 보리스의 차가운 손이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보리스는 나를 보면서 이제까지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더 밝고 즐거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즐겁게 웃고 있는지까지는 잘 알수 없었습니다.

"애나, 그걸 아니? 우리들이 모두 대체 어떤 바보들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가는 바보였다는 걸. 항상. 우리는 모두 널 사랑했어. 그래서 모두가 너를 마지막으로 보려고 했던 거야. 나와 안네 마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바보짓을 했던 거야. 우리는 모두 널 사랑했었어. 하지만 그 때문에 모두가 약속을 깨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어. 그러니까, 이제는 이별할 시간이야. 애나 브라운.넌 우리들을 기억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거야."

 

그리고 보리스 이바노비치 알렉셰예비치는 내 손을 놓았습니다. 안개는 더더욱 짙어져서 나는 물을 건너는 소리 이외에는 그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강 너머를 바라보고있엇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뒤돌아서서 강에서 나와 이제는 눈이 그친 벌판을, 여전히 조용하고 불길한 검은 집들이 늘어선 마을을, 낯설고 사람들이 코트 깃을 세우고 지나다니고 전차가 다니는 시가지를 건너서 집으로까지 돌아왔어요.


"일어나라, 애나. 아침 먹어야지. 왜 마루 소파에서 자고 있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였습니다. 계란을 부치고 양파를 볶는 달콤한 냄새가 거실까지 풍겨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소파위에서 담요를 두르고 베개를 껴안고 누워있었습니다. 담요 안에 감싸인 발은 따뜻했고 아침에 막 난로를 틀어놓아서 따듯한 공기가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벌써 방 안에는 햇빛이 가득비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도 얼른 일어나서 창가로 갔습니다. 해가 이미 높이 솟아올라있습니다. 그리고 날이 따뜻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해가 떠올라서인지 매일 아침마다 보던 서리는 녹아버리고 그 대신 창문에는 물방울들만이 매달려 햇살에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어요. 그건 내겐 마치 창문이 울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엄마는 내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으니까 그리고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까 독서교실에는 하루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내일부터는 절대로 하루라도 빠지면 안돼,애나.알겠지?"
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전게 갔던 식당에서 먹었던 것 같은, 계란과 토스트와 소시지가 얹힌 접시를 주셨습니다. 포크를 들고서 나는 신문을 펼치고 읽으면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호수바닥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 발견'
"어제 저녁 호수에서 남자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호수 근처에서 저수지 및 리조트 개발로 인해서 공사가 벌어지던 도중에 호수 바닥에서 발견된 이 시체는 냉동 상태로 거의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어 화재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이 시신은 약 20년에서 30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히 사인이 총상인 것으로 보아 살해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시체가 어떻게 호수에 유기되었는지가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현재 병원 측에서는 연고자가 있을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으며 역시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는 소지품 상태로 보아 그의 신원은 곧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by viai | 2009/06/23 01:39 | Winter's tales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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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6/23 01:4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zendA at 2009/07/01 17:27
일이 바빠서 제대로 읽지 못했음. 프린트 완료. 조만간 감상 적을께.
Commented by viai at 2009/07/04 18:49
zendA/ 언제나 직장에서 수고가 많으시구만, 양작가. ㅜ_ㅜ 프린트까지 해서 읽어준다니 바쁜 사람 붙들고 조른거 같아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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